<괴산군>
군자산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해있는 산으로 산행경치도 좋지만 산자락에 쌍곡구곡의 명승지도 두루 구경할 수 있다. * 가는 길 : 동서울→괴산 직행버스(1일 18회) 1시간50분 소요, 괴산→칠성 쌍곡 시내버스(1일 4회) 30분
각연사 대웅전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26호이고,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 38 에 위치한다. 각연사 대웅전은 방형의 석축기단 위에 정남향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 다포집이다. 주초는 다듬지 않은 덤벙초석이며 기둥에는 가벼운 배흘림이 있다. 내·외 5출목으로서 주칸에 3구씩 올렸다. 정면 3칸에는 모두 빗살합문을 달아 출입토록 하였으며 측면 앞쪽 칸에도 빗살문을 달았다. 정면 평주 위에는 대두를 장식하여 이례적이다. 건물 내부에는 장엄한 닫집을 달았는데 천개 각부를 후대에 보수하였으나 원형이 잘 남아 있으며 마루는 우물마루이다.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융경(隆慶,1567-1572), 순치(順治,1644-1661), 강희(康熙, 1662-1722)년간에 보수한 바 있지만, 지금의 대웅전은 조선 영조(英祖) 44년(1768)에 중건된 건물이며 최근에는 1979년에 보수하였다. 이 대웅전에는 주불로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약사여래(藥師如來) 그리고 통일대사소상(通一大師塑像)이라고 구전되는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을 모시고 있다.
괴산향교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02호이고, 위치는 괴산군 괴산읍 서부리 33이다. 괴산향교는 조선 초기에 창건되고, 중종(中宗)때 지금의 자리로 이건되었으며, 그 후 여러차례 중수한 건물로 규모와 형식이 향교의 전형적인 격식을 가지고 있고,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공자를 주향하고, 그 양편에 4성을 배향하였으며, 동·서 양무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으로 20현을 종향하고, 매년 춘추로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고 있다.
위정사
문화재자료 제12호이고,위치는 괴산군 장연면 광진리 291이다. 위정사는 숙종(肅宗) 8년(1667)에 위정공(威靖公) 김정경(金定卿)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기 위하여 건립된 사당으로 매년 음력 7월 15일, 10월 29일에 향사하고 있다. 김정경(1345-1419)은 조선 태종(太宗) 때의 장군으로 본관은 안산(安山), 진주목사(晋州牧使) 성경(星慶)의 아들이다. 태조(太祖)에서 태종까지 섬겼으며, 삼군절도사(三軍節度使), 이조전서(吏曹典書) 등을 역임했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일도 있었다. 정종(定宗) 2년(1400)에 제2차 왕자의난(芳幹의난·朴苞의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책록되고 연성군(蓮城君)에 봉군되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威靖祠'란 편액을 걸었으며, 일각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봉학사지 석조여래좌상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30호이고,위치는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산1이다. 봉학사지 석조여래좌상은 불신(佛身)만 남아있던 것을 불두(佛頭)를 찾고, 왼팔목 등을 보수한 것으로 보수부위를 제외하면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이 불상은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法衣)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手印)으로 통식을 따르고 있으나, 오른쪽 발을 왼쪽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항마좌는 그 예가 드문 편이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높이 95cm인 좌불(坐佛)은 나발(螺髮)의 머리에 높은 육계가 있고, 신체에 비해서 큰 얼굴을 약간 숙이고 있는 상호(相好)는 원만하다. 굴곡이 배제된 네모진 상체에 띠주름 같은 삼도(三道)표현, 평판적이고 네모진 형태, 둔감한 옷주름선 등에서 도식화 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세부수법을 통해 보면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지정종별 보물 제433호이고위치는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 38이다.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각연사 비로전에 봉안되어 있는 광배(光背), 대좌(臺座)를 모두 갖춘 완전한 불상으로 신라말부터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비로 자나불상의 하나이다. 화려한 8각대좌 위에 당초무늬와 구름무늬 그리고 연화좌(蓮花座)상의 삼존불 등 9화불이 현란하게 새겨진 광배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 이 불상은 대좌나 광배와 잘 조화되게 아담하고 오밀조밀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육계가 불분명한 머리, 계란형의 단아한 얼굴에 알맞게 묘사된 이목구비, 조용한 미소 등에서 단정한 선사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자세와 지권인을 한 손에서 이루어지는 삼각형 구도의 체구는 우람하거나 격정적인 모습이 아닌 안온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옥천군>
경현당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58호이고,위치는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산53 번지이다. 이건물은 조선시대에 이지방의 초등교육을 실시하던 서당건물로 용문서당을 경현당이라 하였고 숙종23년(1697)에 서사인 경현당과 재사인 용문영당을 지었으나 재사는 허물어져 없어졌다. 서사 건물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의 납도리집으로 오른쪽에는 마루, 왼쪽에는 온돌을 꾸민 소박하고 검소한 구성을 하고 있다. 1987년 3월 31일 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지석묘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0호이고,위치는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 산17번지이다. 이 지석묘는 우리나라 선사시대에 속하는 청동기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덮개돌인 개석을 받치고 있는 받침돌이 땅위에 세워져 있어 그내부가 시체를 넣는 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같이 만들어진 것을 북방식 또는 탁자식 지석묘라고 한다. 원래는 앞뒤를 막았던 받침돌이 있었으나 오랜세월이 경과되어 없어졌다. 이곳에서는 갈돌대, 쪼으개, 가락바퀴 등의 부장품이 출토되었고 지킴돌이 있다. 1980년 2월 28일 대청댐 수몰지역에 위치해 이런것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975년 8월 20일 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사서공(전식) 영정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71호이고,위치 는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 76번지이다 . 조선 제14대 선조때의 문신 전식선생의 영정으로 문관제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좌측을 바라보고있는자세의 초상화를 모시바탕에 그려서 비단으로 배접한 136 × 92cm 크기의 족자이다. 당초의 화상은 단묵화였는데 뒤에 가색하여 얼굴과 가슴부분을 다양하게 보색하였다. 홍배는 연꽃잎에 부엉이를 수놓은 기법으로 당시의 자수풍을 잘 나타내고 있다. 1992년 10월 23일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청석교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21호이고,위치는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 번지. 돌다리는 높이 175cm, 너비 220cm, 길이 983cm인데 양쪽 개울가를 돌로 쌓고 개울바닥에 장대석을 놓은 다음 각석주를 세우고 그위에 넓은 판석을 얹어놓은 다리이다. 현재 동쪽에는 교각이 3개만 남아있으나 본래는 한개 더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서쪽 개울가에도 석축이 있었을 것이나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다리는 근년까지 사용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옆에 시멘트다리를 설치하여 이돌다리를 보호하고 있다. 1982년 12월 17일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송시열 유허비
도지정 기념물 제45호이고,위치는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134-2번지 . 송시열 유허비는 단칸 팔작 기와집의 비각안에 세워져 있으며 비좌를 합쳐 3m의 높고 큰비로서 그형태는 장방형의 비신에 지붕모양의 비갓을 씌웠는데 앞면에는 해서로 "우암 송선생 유허"라 썼고, 뒷면에는 "숭정후 삼술이월일"이라고만 적혀 있다. 송시열 선생의 본관은 은진이며 자는 영봉이고 호는 우암, 시호는 문정으로 1607년 선조40년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 그의 외가 곽씨문중에서 출생한 조선중기의 대유학자 이다. 1976년 9월29일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용암사 쌍석탑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3호이고,위치는 옥천군 옥천읍 삼청리 산51-1번지이다 . 이 두 석탑은 4m 높이로 같은 형태이며 용암사 동편 탑봉의 자연 암반위에 나란히 서 있다. 이중 기단위에 3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상륜부를 장식한 일반형 석탑이다. 각층 탑신 옥개석의 조성수법이나 옥개 받침등 각부의 양식이나 수법으로 보아 고려중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974년 4월10일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두암리 삼층석탑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20호이고,위치는 옥천군 이원면 이원리 624번지이다. 2층기단위에 3층탑신을 형성하고 그위에 상륜부를 장식한 일반형 석탑이다. 하층기단에는 각면에 3구씩의 안상이 조각되었으며 갑석은 4매의 판석으로 이루어 졌다. 삼층기단은 각면에 양우주와 1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한돌로 조성되었는데 초층탑신에는 정면에 문비와 자물통이 조각되어있어 주목된다. 기단부와 탑신부의 짜임새로 보아 건조연대는 고려 전기로 추정된다. 1982년 12월 17일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청원군>
계산리 오층석탑
보물 제511호로 청원군 가덕면 계산리 48번지에 위치해 있다. 피반령 북쪽 기슭의 계산리 장터마을에 있는 이석탑은 계산리사지에 남아있는 유일한 석조물이다. 절터는 모두 폐허가 되어 논 밭으로 변하고 5층석탑만이 중심부에서 옛자리를 지키고 있다. 단층기단과 5층의 탑신부는 원형대로 있으나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는데 전체적으로는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문산관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청원군 문의면 문산리 산6-1번지에 위치해 있다. 문산관은 조선시대 문의면의 객사이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있던 관사로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전패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달에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한편 중앙에서 내려온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봉석주 부조묘
문화재자료 제8호로 청원군 문의면 마동리 168번지에 위치해 있다 . 봉석주 부조묘는 조선 숙종 20년(1694)에 회인현 서면 동막리 오늘날의 청원군 문의면 마동리 동막마을에 단종 1년(1453) 계유정난때 세조를 도와 정난공신 2등에 책록 강성군에 봉해진 봉석주(1418-1465)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일명 강성사 또는 하음사라고 하며 매년 음력 9월 15일에 향사하고 있다. 지금의 사당은 1926년에 중건하고 1970년에 보수한 건물로 홑처마 맛배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체화당사
도지정 기념물 제73호로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에 위치해 있다. 체화당사는 조선 숙종 27년(1701)에 송헌 노계원(1532-1586), 국헌 노후원(1533-1592), 지평 매헌 노종원(1535-1583), 죽헌 노일원(1539-1611)등 4형제의 위패를 봉안하고 설립한 서원이다. 지금의 서원은 1967년 중건하고 1988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반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다.
삼세 충효문
도지정 기념물 제40호로 청원군 북일면 비중리 111-1번지에 위치해 있다. 삼세 충효문은 조선 숙종 43년(1719)에 여진족과 싸우다 전사한 경흥부사 충정공 퇴수헌 나사종의 충절을 기리어 세운 충신각과 인조 16년(1638)에 나운걸과 그의 아들 빈·린 형제의 효성을 기리어 세운 삼효각을 합하여 부르는 2개의 정려각이다.
손병희선생 유허지
도지정 기념물 제30호로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 385-2번지에 위치해 있다. 조선 철종 12년(1861) 4월 8일에 의암 손병희 선생이 출생하여 자란 집이다. 선생이 태어난 생가는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초가집으로 1971년에 해체 보수하였고 1961년에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세운 유허비가 있다. * 월리사 대웅전: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58호 )위치: 청원군 문의면 문덕리 5번지 . 월리사 대웅전은 이 절의 입구에 있는 사적비에 의하면 조선 효종 8년(1657)에 명현당 원학대사가 이웃에 있던 신흥사를 옮겨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의 다포식이다.
충비 삼월의 비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 산 16번지에 위치해 있다 . 오창면 양지리쪽에서 목령산을 오르는 산중턱에 김윤의 묘소가 있고 묘역좌측에 노비 삼월의 비가 있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이 비는 작지만 보존상태는 매우 좋은 편이며 돌이끼가 끼어 고색이 창연하다. 비의 앞면은 「충비삼월지비」라 쓰여있고 뒷면에는 삼월의 공적내용이 새겨져 있다.
문의향교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94호로 청원군 문의면 미천리 220-1번지에 위치해 있다. 문의향교는 조선시대 문의지방에 있던 관학기관으로 지금의 향교는 1980년에 중건하고 1988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겹처마 목조기와집인 대성전과 그 앞에 정면 4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인 명륜당을 두고 앞에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으며 입구에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단양군>
고수동굴
천연기념물 제256호이고, 위치는 단양군 단양읍 고수리 산4-2이다 . 고수동굴은 약4억5천만년 동안 생성 되어온 석회암 자연동굴로서 현재 관람이 개방된 길이는1.7km, 입구높이 5m, 폭 5m, 관람소요시간은 약30∼40분 정도이다. 지하수가 많이 흘러들어 다양한 형태의 종유석과 석순이 잘 발달되어 있으며 지하궁전을 연상케 하는 장년기의 동굴 지형을 이루고 있다. 동굴의 특색은 지질학적으로 동굴의 생성원인을 밝혀주며 형성물의 특이한 배치와 석주, 호신상 등이 특이하다.
노동동굴
천연기념물 제262호이고,위치는 단양군 단양읍 노동리 산74이다. 노동동굴은 약4억5천만년 동안 생성된 석회암 자연동굴로서 현재 관람이 개방된 길이는1.4km 동굴입구에서 30m전진하여 높이8m에서 두방향으로 양분된 수직동굴이다. 관람소요시간은 약30∼40분정도이다. 동굴 상층부에는 종유석,석주와 석순이 잘 발달되어 있고 하층부에는 황금바위의 거대한 석순이 장엄한 모습을 하고 있다.
구낭굴 구석기유적
도지정 기념물 제103호이고,위치는 단양군 가곡면 여천리 산32이다. 석회암 동굴인 구낭굴의 형성시기는 마이오세(miocene)나 그이전의 따뜻하고 습기가 많아 석회암 용해가 활발하였던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986∼1988년까지 2차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제4기 홍적세(구석기시대)에 구낭굴에서 사람들이 살면서 문화행위를 하였음이 밝혀졌다. 동굴입구가 남동방향으로 향하여 있으며 동굴의 규모는 입구넓이5.5m 동굴길이140m로 규모가 큰편으로써 남자 어른의 발목뼈, 발등뼈, 발가락뼈가 발견되었고 짧은 꼬리원숭이, 꽃사슴, 곰, 호랑이 등의 짐승화석과 석기, 뼈연모 등이 발굴되었다.
온달동굴
지정종별 천연기념물 제261호이고,위치는 단양군 영춘면 하리 산62이다. 남굴이라고도 불리며 성산아래에 위치해 있어 일명성산굴이라고 명명되었고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되어 있다. 동굴의 생성연대는 약4억5천만년 동안 생성된 석회암 자연동굴로서 현재 관람이 개방된 길이는760m 입구높이5∼10m 폭5m 관람소요시간은 약30분정도이다. 또한 이 동굴은 온달장군이 수도하였던 장소로 전해내려 오고 있으며, 6.25사변시에는 피난처로 이용했던 곳이기도 하다. 지하수가 풍부하여 다른 동굴과는 달리 담회백색 석순과 종류석이 잘 발달되었고 동굴내부의 온도는 여름철 14도 겨울철16도 수온12도로 피서지로서 적합하다.
영춘향교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06호이고, 위치는 단양군 영춘면 상리 461이다. 본래 조선 정종 원년(1399)에 현곡1리에 창건되었는데 지형이 좁고 험해서 광해군6년(1614)에 지금의 남천리 대어구로 옮겨다가 화재를 당하여 숙종30년 현위치로 이전 후 여러차례 중수한 바 있다. 건물의 배치는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문묘공간 대성전의 오른쪽 앞쪽에 위치한 특이한 형태를 보여준다.
적성비
국보 제198호이고, 위치 는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3-1이다. 삼국시대에 신라가 죽령을 넘어 단양일대에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여 국경을 넓히고 이곳의 백성들을 선무한 내용이 담긴 기념비이다. 당시 진흥왕이 명하여 신라척경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 야이차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신라에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포상을 내리겠다는 국가시책과 민심을 안정시키고 적성주민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이 석비의 건립연대는 신라 진흥왕6∼11년(545∼550)경으로 추정된다. 이 비는 1978년 1월 6일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발견 조사되었으며, 규모는 높이93㎝ 상폭100㎝ 하폭53㎝ 석질은 자연석 화강암으로 창녕진흥왕 순수비보다 10년전에 만든 국내최고의 금석문이다. * 가는 길 : 동서울에서 1일 12회 운행하는 고속버스와 30분간격으로 운행하는 신단양행 버스이용 - 단양 -> 단성간 1일 14회 시내버스 운행(소요시간 30분)
향산리 3층석탑
보물 제405호이고,위치 는 단양군 가곡면 향산리 471-1이다. 신라 눌지왕(435년)에 묵호자가 향산사를 창건하였고 묵호자가 열반후 제자들이 탑을 건립하고 사리를 봉안하였다. 향산사는 임진외란때 전소되고 3층 석탑만 남았으나 일제시대 1935년 도굴꾼에의해 사리가 도난되고 완전해체된 것을 이곳 주민들이 다시 세운 것이다. 이 탑의 규모는 높이4.4m 기단폭1.8m이며 기단부 중대석 각면에는 우주와 탱주를 모각하여 두 부분으로 모각하였고 상층기단 중대석의 각면에도 우주와 탱화를 모각하여 갑석은 두장씩 판석으로 되어 있다. 이 석탑은 조각수법이 단정하며 소박하고 비례 균형이 잘 정제된 신라하대의 전형적인 석탑이다.
죽령산신당
지정 민속자료 제3호이고, 위치는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산49-9이다. 조선 중기에 관군이 도적떼를 소탕할 때 한 노인이 공을 세우고 전사한 것을 기념하고자 조정에서 사당을 세우고 주민들이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그러나 그 시대가 분명하지 않으며 이 사당의 건립연대 또한 확실하지 않다. 산신당 또는 국사당이라 부르는데 그이후 1948년 3월 8일 주민들의 성금으로 중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음성군>
감곡천주교회 성당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88호이고,위치 는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 감곡천주교회는 1896년 프랑스 신부인 임가밀로 신부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전국에서 열 여덟 번째로 세워진 성당이며 충북도내에서는 최초로 건립된 성당이다. 1930년 지금의 고딕식 성당을 건립하고 1934년 지금의 화강석으로 된 사제관을 2층으로 지었다.
서정우 가옥
중요민속자료 제143호이고,위치 는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 서정우 가옥의 건축연대는 19세기 후반으로 추측되며, 1924년에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 전체적으로 튼'ㅁ'자 모양의 구성이지만 원래의 사랑채는 'ㅡ'자집이었으며, 북쪽으로 대문간을 잇달아 연결해서 곱은자집으로 만들었다. 안채는 중부방식으로 부엌, 안방, 윗방을 배열하고, 꺽어져서 2칸대청,건너방을 두었다.건너방의 아궁이는 동쪽머리퇴에 두고, 앞의 퇴마루는 평으로 하였다. 특이한 것은 부엌 위에 만들어진 합각으로 연기가 빠질 수 있도록 까치구멍으로 했다. 사랑채는 사랑방을 내세우고 대문간은 뒤의 측면으로 낸 것은 우리나라 공간 구성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전체적으로 민가 건축의 소박한 맛을 지니고 있다.
미타사 마애여래입상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30호이고,위치 는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미타사. 미타사 입구의 화강암 자연석에 동쪽으로 향하여 새겨져 있다. 이것은 머리 부분과 어깨 부분은 도드라지게 양각하였으며 양손과 허리, 양발 부분은 낮게 부조하거나 음각선으로 처리하였다. 그리고 머리는 소발이며 상호는 원만하게 표현하였으며 수인은 통인이고 법의는 우견편으로 의문은 사선으로 가슴밑으로 흘리고 있다. 이 마애불의 높이는 405㎝이며 고려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운곡서원
문화재자료 제11호이고,위치는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 조선 선조 35년(1602년)에 충주목사 정구가 이미 있던 백운서당에 주자를 모시고 백운서원이라 하였는데 현종 2년(1661년)에 정구를 배향하고 운곡서원이라 하였다. 숙종2년(1676년)에 사액을 받았는데 이때 주자의 영정과 화상찬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 8년(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폐원되었다가 고종 29년(1892년)에 지방 유림의 발기로 설단향사하고 고종31년(1894년)에 서원을 재건하고 이듬해 구영정을 가져와 봉안하였다. 1963년 중수하고 1974년 단청공사를하여 오늘에 이른다.
태교사
문화재자료 제7호이고,위치 는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 . 태교사는 조선 영조20년(1744년)에 주응동이 안성에 거주하는 김문웅으로부터 주자의 영정을 기증받아 주씨문중에서 문곡영당이라 칭하는 사당을 창건하고 서원을 개원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원되었다가 1893년 재건되어 사당명칭도 태교사라 하였다. 태교사의 건물배치를 보면 사당, 강당인 재실,삼문으로 되어 있는데 외부와의 경계를 구획한 홍살문을 지나서 전면에 강당인 재실이 있고 그뒤에 따로 담장을 돌리고 소슬삼문 형식의 삼문을 설치 하였으며 삼문을 지나 사당이 배치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강당이 앞에 놓이고 사당이 뒤에 놓이는 전당후묘식의 배치법을 따르고 있다.
신후재 영정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54호이고,위치 는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 신후재 영정은 정장관복을 입고 의자에 앉은 전신상으로 복식은 조선 숙종 연간의 제식을 따랐으며 손은 공수를 취하 지 않고 양손에 홀을 받들어 쥐었으며 긴 손톱의 형용 단려 위에는 각대를 나타내지 않았고 의좌와 족좌대가 겹쳐지게 불합리한 형태로 표현하였다. 이 영정은 후손가에 전해오는 바대로 신후재가 청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왔을 때 가지고 온 것으로 추정되며 초상화 연구의 중요한 자료라고 볼 수 있다.
음성향교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04호이고,위치는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향교말이다. 음성향교는 조선 명종 15년(1560년)에 창건되었으며 고종 7년(1870년)과 고종 24년(1887년)에 각각 중수가 있었고 명륜당은 효종2년(1651년)에 중수가 있었으며 1979년 내삼문과 명륜당을 보수하였고 막돌담장을 신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향교의 건물 구조는 후묘전당으로 안담장에 내삼문을 두어 구획하고 있는데 문묘에는 대성전이 있고 강당인 명륜당, 동서양재,고자사 등 부속건물이 있다. 음성향교는 본래 옛날 음성현의 동쪽1리인 지금의 석인리에 있었는데 그 뒤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한다.
<보은군>
법주사 석연지
국보 제64호이고,위치는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이다. 8각의 지대석위에 3단의 괴임을 만들고 다시 복련 1층을 첨가하였다. 그위에 버섯모양으로 솟아오르는 형태의 구름을 나타낸 중간석을 끼워서 큰 연지를 받치고 있다. 연지 표면에는 밑으로 얕게 소문의 연판을 돌리고 그 상부에 웅대한 복판연화가 있는데 판내에는 보상화문이 조각되었다. 내부는 파서 물을 담게 되었고 구연외주에는 난간을 돌렸는데 하반은 방주형을 모각하고 그 사이 구간에 보상화를 양각하고 상반은 동자주를 세우면서 원형난간을 횡가하고 있으며 이와 같이 연꽃을 이중으로 조각하여 전체가 하나의 연꽃송이 같다.
법주사 석조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70호 이고,위치는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이다. 신라 성덕왕 19년(서기 720년)에 조성된 것으로 미륵불 우측에 있으며 법주사에 삼천승도가 살았을 당시 물을 저장하는 용기로 사용하였다고 하는 정방형의 대형 석조이다.
고봉정사
도지정 기념물 제51호이고,위치는 보은군 마로면 관기리 458-1이다. 조선조 중종 때의 학자이며 영의정에 추증된 문정공 원정 최수성(1487∼ 1521)선생이 형조판서를 지낸 충암 김정과 이조정랑을 지낸 병암 구수복과 함께 1519년 기묘사화전 낙향하여 정자를 세우고 강학을 하던 곳이다. 산 정상에 모정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고 아래 있는 정사가 퇴락하여 1981년에 보수하고 삼문을 신축하였다. 현판은 우암 송시열 선생의 친필이다.
보은향교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95호이고,위치 는 보은군 보은읍 교사리이다. 조선 세종때에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인조 이후 여러 차례 중건하고 보수하였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등이 있다. 명륜당은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하게 된 상현서원의 강당을 옮겨 지은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된 목조와가이다. 대성전에는 5성, 10철, 송조 6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을 봉행하여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소장 전적으로는 <순암집>등의 문집수권과 <공부자성적도>등이 있다. 현재 전교 1명과 장의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보은의 백송
천연기념물 제104호이고,위치 는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산 16이다. 백송은 소나무과에 딸린 상록교목이며 높이 11m 가슴높이의 둘레 1.8m로서 지상 4m 높이에서 가지가 갈라져서 동서로 12m 남북으로 13m 정도 퍼졌고 수령은 200여년으로 보고 있다. 이 나무는 중국 특산종이며 조선 정조 18년(1792)에 이 마을에 살던 김씨의 선조 탁계 김상진이 중국에서 돌아올때 가져온 것이라고 전한다.
순조대왕 태실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1호이고, 위치는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산 1-1이다. 순조의 태실은 정조의 둘째왕자로 태어났을 때는 태를 이곳에 안치 하였다가 왕위에 오른 후인 1806년(순조 6년)에 왕의 태실로서 석물을 갖추고 태실비를 세웠다. 1927년 조선총독부에서 태항아리를 창경원으로 옮겨 가고 지금은 석비와 석조물만 남아 있다. 태실은 팔각형으로 돌난간을 두른 정역을 만들고 그 안에 팔각원당형의 부도식 태실구조로 되어 있다. 그 앞에는 거북으로 만든 받침돌 위에 용머리를 한 태실비가 있으며 전면에는 주상전하태실이란 비문이 음각되어 있으며, 후면에는 가경 11년 10월 12일이라 각서되어 있다. 태실을 봉안한 후 이 산을 태봉산이라 하였고 보은현은 군으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법주사 쌍사자석등
국보 제5호이고, 위치는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이다. 두마리의 사자가 마주서서 뒷발로 복련석을 밟고 앞발로 앙련석을 받치고 있다. 서있는 복련석은 8각 지대석위에 높직히 놓여 있으며 앙련석 주위에는 2중으로 연판이 조각되었다. 화사석은 8각으로 높직한테 4면에 화창이 있고 그 주위에 작은 구멍이 있다. 넓직한 팔각 개석에는 조식이 없이 소박하고 안정된 감을 주며 정상에 보주가 얹혀있다. 이 석등은 사자를 이용한 석조물중 가장 오래된 예로서 전체의 형태에서 장중한 품격이 엿보이며 신라 석등 중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의 하나로서 석등의 간주석을 석사자로 대치한 이 석등은 전형양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8각의 지대석 위에 하대 연화석과 쌍사자 연화대 방석을 모두 하나의 돌에 조각한 것이며 다른 석등에 비해 화사석과 옥개석이 큰것이 특징이다.
법주사 대웅보전
보물 제915호이고, 위치는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209이다. 한국 삼대불전 가운데 하나인 이중층전각은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창건되어 혜공왕 12년(776)에 진표율사가 중창하였고, 다시 조선인조 2년(1624) 벽암선사가 삼창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전각의 양식은 내,외 2출목으로 공포를 짜 기둥위에는 물론 기둥사이의 평방위에도 공포를 놓은 다포식으로 되어있다. 살미첨자의 끝은 직선에 가까운 양서로 되어 강직한 맛을 주고 있으나 끝에 가서는 가늘어져 조선 중기이후의 쇠서의 맛을 주고 있다. 내부에는 고주를 세우고 이 고주와 1층의 평주사이에 퇴보를 놓고 이 퇴보위에 2층의 평주(변주)를 놓아 금산사의 2층 전각인 미륵전과 같은 수법으로 되어있다. 전각안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는데 이는 법신, 보신화신의 삼신불이다.
<제천시>
원호유허비 및 관란정
도지정 기념물 제92호이며,위치는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산14-2번지에 위치한다. 원호유허비 및 관란정은 '94.6.24 지방기념물 제92호로 지정되었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여 영월에 안치된후 관란 원호(생육신)가 단종을 추모하여 이곳에 설단하고 조석으로 눈물을 흘리며 망배하던 곳이다. 원호가 죽은 뒤 후손과 유림들이 충의를 앙모하기 위하여 헌종11년(1845)에 정자를 세우고 관란정이라 하고 유허비를 세웠다.
김세균판서고가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88호이며,위치는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723-3이다 . 한말 이조판서를 지낸 김세균의 소실이 살던 집으로 1981.5.1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88호로 지정되었고, 한수면 북노리에 있던 것을 충주댐건설로 안체는 충주시 살미년구룡리로, 사랑채는 송계2리로 이건하였다. 7자집 8작기와집이다.
명오리고가
도지정 민속자료 제5호로 위치는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723-1이다. 조선말 목조 ㄱ자 집으로 한수면 명오리 풍무골에 있었으나 충주댐 수몰로 송계리 723-1번지로 이건하였고, '81.5.1 지방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였다.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 사랑채가 가까이 있어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신륵사극락전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위치는 제천시 덕산면 월악리 803-5이다 . 월악산국립공원인 덕산면 월악리 804-5번지에 위치한 신륵하극락전은 지방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신라 진평왕 4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 한다. 다수의 탱화와 3층석탑, 당간지주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마애불상
보물 제406호로 위치는 제천시 한수면 송계리 산1-1이다 . 월악산국립공원인 한수면 송계리 산1번지에 위차한 보물 제406호로 조성년도는 11세기 경으로 추정되며 화강암에 평면 직립으로 조각된 높이 13m의 불상이다. 덕주사지 위의 바위에 조성된 불상은 마의태자 누이인 덕주공주가 자신의 형상을 조성하여였다 전한다.
응청각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90호로 위치는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 산6-20이다 .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관아의 부속건물로 부사가 휴식을 취하고, 공무차 내려온 중앙의 관속들이 객사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청풍면 읍리 203-1번지에서 충주댐건설과 함께 청풍호반이 내려다 보이는 청풍문화재단지로 이전하였다.
<영동군>
가곡리 고가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47호이고,위치는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이희마을 467이다 . 이 건물은 1917년 건립된 살림집으로 안채와 사랑채 솟을삼문형의 대문이 남아 있다. 一자형 평면의 안채는 자연석 기단 위에 사각형 주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는데 기둥머리에 간결한 양봉을 결구하였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는데 망와에(조선개국525년 병진월 10일 수부귀 남자)라고 양각된 명문이 있으며, 지붕 네 귀퉁이 명와에는 태극의 4괘문을 양각하였다.
김자수 유적
도지정 기념물 제41호이고, 위치는영동군 심천면 각계리 382이다. 선지당은 경주김씨 중시조이며 고려말에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김자수와 조선 문종(1450-1452) 재위때 강릉판관을 지낸 그의 손자 김영년이 살던 곳으로 김영년은 사임후 이곳에서 후학 양성에 몸받쳤다. 이 집은 중종(1506-1544) 재위때 지어 많은 인재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인데 순조(1800-1834) 재위때 김노경이 선지당의 당호를 친필로 현판하였고, 추사 김정희가 '장의자손'이란 친필로 편액한 것이 현재 보존되어 있다. 김공 정효비각은 조선 인조때 효성이 지극했던 김은(1640)과 김추(1648) 형제를 기리기 위해 경종 원년(1721)에 세운 비이다.
반야사 삼층석탑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86호이고,위치는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 151-3이다. 이 탑은 1950년경 반야사 주지 조성학이 석천계곡 물을 따라 1㎞지점에 「탑벌」이라는 곳의 원산지에서 운반하여 현재의 위치에 재건한 것이다. 대웅전 앞에 토단을 조성하고 지대석을 놓았다. 조합된 지대석 윗면에는 우각의 합각선과 기단받침을 조출하였다. 기단부는 각 면석을 별석으로 조합하였고 양우주와 일탱주를 모각하였다. 각석의 윗면에도 합각선과 초충탑신 받침을 조출하였다. 초충탑신에도 양우주를 모각하였는데 동·서의 벽면석은 신조하였다. 각층 옥개석의 낙수면은 물매가 급한 편이며 옥개석 받침은 초층 5단, 2-3층에서는 4단으로 되어 있다. 2층 탑신의 높이는 초층에 비해 급격히 체감되었으며 (초층탑신고 56㎝, 2층 탑신고 26㎝)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이 유존되고 있다.
성위제 가옥
중요민속자료 제144호이고,위치는 영동군 학산면 봉림리 708이다. 이 집은 안채, 사랑채, 광채, 문간채, 일각대문, 사당 등으로 구성 되었다. 안채를 포함해서 모두 20세기 초 이후의 건물인데 다만 광채만이 18세기 정도로 추정되는 아주 특이한 건물이다. 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목조 초가지붕집으로써 오른쪽 한칸만 외부로 개방하여 헛간으로 쓰고 있을 뿐, 나머지 3칸은 번지널(판자) 벽으로 두르고 마루를 깔아서 광으로 쓰고 있다. 이와 같이 널다란 번지널을 큼지막하게 세로로 끼우는 것은 대단히 오래된 고식기법이며, 특히 집 한가운데에 높은 기둥을 세워서 상도리를 직접 받는 가구법은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오래된 법식이다. 목재의 가공도 주로 자귀만을 사용해서 그 흔적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기둥과 하방의 맞춤기법은 오래된 법식으로 인상적이고 누각에는 사당을 모시고 있고, 외가리(황새)가 누각나무에 수십마리 서식하고 있다.
가학루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22호이고,위치는 영동군 황간면 남성리 140이다 . 황간향교 앞에 있는 이 누각은 조선 태조 2년(1393)에 황간 현감 하첨이 창건하였는데 뒤에 경상도 관찰사 남공이 마치 학이 바람을타고 떠다니는 듯하다 하여 가학루라 편액하고 이첨이 기문을 썼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때 현감 손번과 구장원이 중건하고 숙종 42년(1716) 현감 황도가 기와를 보수하고 정조때 현감 이운영이 중수하고 1930년에 김석영 군수가 다시 중수하였다 건물구조는 목조 단층의 정자로 정면 4칸, 측면 4칸의 이익공 팔작집이다.
영국사 부도
보물 제532호이고,위치는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산 138-1이다. 이 부도는 영국사 경내에서 남쪽으로 약 200m되는 언덕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고려대에 많이 조성되었던 8각원당형 부도로써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는데 지대석부터 탑 꼭대기 공모양의 부분까지 각 부분이 완전하다. 8각의 지대와 하대가 한돌로 지대석 위에 괴임 1단을 마련하여 탑 전체를 받치고 있다. 부도는 대석과 신석개석으로 이루어졌는데 대석은 상.중.하로 구성되어 특히 상대의 연꽃과 중대석 각면의 안상이 주목된다. 신석에는 각면에 양 우주가 정연하고 정면에는 장방형의 문짝이 본보기로 새겨져 있다.
신항리 상여
도지정 민속자료 제8호이고,위치는 영동군 용산면 신항리 24이다. 이 상여는 왕가의 상여로 순종 3년(1909) 기유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이용강 대감의 장례에 쓰인 것을 마을 주민들이 관리하면서 사용해 왔다.
영동 화수루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65호이고,위치는 영동군 상촌면 하도대리 81이다. 이 건물은 원래는 조선 중기인 명종 원년(1546)에 옥계서당으로 세웠던 것을 순조 4년(1804)에 고성남씨 수일파 문중에서 후손들에게 학문을 전수할 목적으로 현 위치에 옮겨짓고 이름도 바꾼것이라고 한다. 정면2칸, 측면2칸의 간결한 누각식의 건물로, 전면 2칸은 우물 마루를 깐 누마루로 만들고 후면 2칸은 온돌방을 들였다.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건축양식에 따라 지은 것인데, 덤벙주초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기둥위에는 초익공의 간단한 공포를 짰으며 기둥 사이는 3구씩의 소로만을 끼웠다. 정면과 측면의 칸수를 같게 하고 사면에는 난간을 돌리었으며, 누마루를 두는 등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즐겨 이용하던 누정건축의 특징이 잘 갖추어져 있다.
무첨재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72호이고,위치는 영동군 매곡면 옥전리 558-1이다. 이 건물은 조선 중종때 기묘사화를 피하여 낙향한 왕가의 외손안요가 후학양성에 뜻을 두고 중종 17년(1522)에 건립하였으며 후학들이 부끄럼없이 세상을 살아가라는 뜻에서 무첨재라 하였다. 건물 구조는 정면4칸 측면2칸 홑처마 팔작지붕의 오량가로 자연석기단, 덤벙주초 위에 원주를 설치하였다. 1872년 화재로 일부가 소실된 후 중수되었고, 1911년, 1948년, 1994년에도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중앙 2칸은 우물마루를 깔아 넓게 대청으로 이용하고 양끝은 온돌방으로 하였다. 공포는 익공양식이며 봉두를 결구하였다.
영국사 대웅전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61호이고,위치는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산 138-1이다. 본래의 가람은 현 대웅전에서 주봉인 지륵산 상봉쪽으로 100m쯤 올라간 일대의 경작지가 되고 있는 위치에 세워져 있었다고 전한다는데 이곳 옛 사지에는 많은 기와쪽이 산재해 있어 최근까지도 땅을 파면 기와쪽과 청자, 백자쪽이 출토된다고 한다. 그리고 현지에는 건물을 비롯한 경내 곳곳에 오래된 양식의 길고 큰 돌이 많이남아 있으므로 곧 신라, 고려대에 걸친 큰 절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현존 유물로는 조선시대 후기의 건축물인 대웅전과 근래에 세워진 산신각 요사등 목조건물 이외에 금속제품으로 동제타종 1구가 보존되어 있으며 이밖에는 모두 돌로 만든 건물들이다. 영국사가 자리잡고 있는 지륵산은 영산으로 이름이 높다.
<진천군>
금성대군 사우
문화재자료 제9호이고,위치는 진천군 초평면 용기리 416. 금성대군(1426-1457)은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나 이름은 이유이고 어머니는 소헌왕후이다. 사당은 조선 영조 16년(1740)에 창건하고 1974년에 보수한 목조와가 맞배집이다.
길상사
도지정 기념물 제1호이고,위치 는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508 .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흥무왕 김유신장군의 사당이다.
신헌고택
문화재자료 제1호이고,위치는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826 . 신헌고택은 신헌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1850년에 건축된 고가로서 주택 1동,부속사 1동으로 되어있다.
송인묘소
도지정 기념물 제91호이고,위치 는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 산21-7 . 송인은 고려 인종때 공신이며 진천송씨의 중시조이다. 묘소 봉분을 돌로 4각 장방형으로 쌓은 고려의 독특한 묘제로 묘갈이 세워져 있으며 1875년에 다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용화사 석불입상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38호이고,위치는 진천군 진천읍 신정리 584-4 화강암으로 된 불상으로 높이 7m, 아래부분의 폭이 1.7m이다. 불상의 목부분에는 영락이 있고 손에는 연꽃을 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불상은 김유신장군의 삼국통일의 위업을 기리기 위한 송덕불상이라 불리어 지고 있다.
김유신장군 탄생지
도지정 기념물 제79호이고위치는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산19 . 흥무왕 김유신장군이 탄생한 곳으로 탄생지 뒤에는 장군의 태를 묻은 태령산이 있고 주위에는 당시 식수로 사용하였던 연보정과 말을 훈련 시켰다는 치마대가 있다.
정철묘소
도지정 기념물 제106호이고,위치는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산 14-1 . 송강사 남쪽 100m 지점에 위치한 정철묘는 높이 1.6m, 둘레 20m의 봉분과 상석, 묘비, 문신석과 양쪽에 망주석이 있다. 묘는 조선 현종 6년(1665)에 송시열선생이 현 위치로 장지를 정하였다.
김유신태실 및 돌담
도지정 기념물 제108호이고,위치 는 진천군 진천읍 문봉리·상계리. 해발 461.8m의 산정에 직경 9m, 높이 1m의 원형으로 석축이 있고 그 주위에 동쪽으로 경사면을 에워싼 길이 216m, 높이 1-1.3m 규모의 석축이 산성처럼 드리워져 있으며, 우리나라 태실의 최고형식에 속하는 중요 유적이다.
노원리 마애여래입상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89호이고,위치는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노곡 . 상호에서 발끝까지 얕은 부조로 조각한 이 불상은 전체적으로 도식화 되었으나 두광과 신광, 두정 등이 뚜렷하며 상호에서 보이는 원만상은 타불상과 비교되는 특징이 있다. 불상은 높이 6.1m, 너비 4.2m이며 고려시대에 유행한 거대불상의 계보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불상이다.
<충주시>
박팽년사우
도지정 기념물 제27호로 충주시 신니면 신청리 94 번지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의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박팽년을 모시는 사당으로 선생의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이며 본관은 순천이다. 숙종때에 복원되어 충정이란 시호를 받고 세워 졌으며, 건물이 노후화 되어 1968년 충주시에서 복원 단청되었다.
경종 대왕 태실비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6호로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산35-1번지에 위치해 있다. 경종대왕 태실비는 숙종 14년 10월 장희빈이 왕자를 탄생 이곳에 태실을 축도 안치하고 경종대왕에 즉위하자 태실비를 세웠다. 영조 2년(1726년) 9월8일에 영조임금이 선왕의 태실을 돌로 깍은 8각형 난간으로 두르고 비석을 세워 순호군 16명을 두어 3년주기로 제를 올렸다. 일제시대에 태실의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1928년 전국의 태실을 옮겨 석조물만 있는 것을 충주시에서 1976년 다시 현 위치에 세웠다.
충주 단오사 3층석탑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충주시 단월동 455 번지에 위치해 있다. 이 탑은 양식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로 추정되나 기록에는 邑南藥師殿 삼층석탑 新羅 라고 되어 있어 석탑의 건립은 통일신라 시대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탑은 주변의 단오사 사찰 경내에 있으며 단오사 철불좌상과 같이 문화재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누암리 고분군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충주시 가금면 누암리 산 41 번지에 위치해 있다. 누암리 고분군은 소지명이 무지고개로 전하는바 주변의 고분이 6 ∼ 70기 정도로 남아 있다. 자연석을 쪼개서 쌓아올린 고분들로서 지금은 탐방객들이 볼수 있도록 복원 되어 있다.
자양금(거문고)
도지정 민속자료 제9호로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47-5 (중원향토자료전시관)에 위치해 있다.. 성제 유중교(1821 - 1893)가 연주하던 칠현의 거문고로서 그의 후손인 유연호가 소장하였던 것을 기증받아 중원 향토민속자료전시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으며 1800년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거문고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수일장군 묘
도지정 기념물 제21호로 충주시 금가면 오석리 산 202-1번지에 위치해 있다 . 충무공 이수일장군은 1554(명종 9년)∼1632(인조10년) 이조 인조때의 공신으로 시호는 충무공이다. 1583(선조 16년)에 무과에 급제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 싸워 큰 공을 세웠고 이괄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선무진무양공산의 호가 내리고 계림부원군에 피봉 벼슬이 형조판서 좌의정에 이르렀다.
임충민공 충렬사
사적 제189호로 충주시 단월동 385 - 1 번지에 위치해 있는 이곳은 조선16대 왕 인조때의 명장 임경업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1594년 이곳 충주 대림산 기슭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에 출중 하였으며, 1618년(광해군 10)에 무과에 급제한 후 군, 목사, 부사 등을 거쳐 주로 국토방위에 공헌이 큰 장군이다. 1624년(인조2)에 이괄의 난으로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장군이 반란군을 진압하여 진무원종공신 1등으로 서훈이 되었다. 그 후 1706년(숙종 32)에 나라에서 장군에게 충민의 시호를 내리고 1727년(영조3)에 장군을 모시는 사당을 세워 충렬사라 사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