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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봉화의 성암고택에서 보내는 한여름

두타 2011. 1. 1. 16:34

2010 향린 새날 수련회


봉화의 성암고택에서 보내는 한여름

 

때 : 2010년 8월 13일~15일

곳 : 경상북도 봉화군 일대

향린교회 새날청년회

 

1. 새날의 수련회 장소 안내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慶尙北道 奉化郡 春陽面)


  2010년 향린 새날의 여름수련회는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으로 갑니다. 봉화군은 경상도의 가장 북쪽에 위치합니다. 북쪽은 강원도 태백, 동쪽은 경상북도 울진, 남쪽은 영주, 서쪽은 백두대간(白頭大幹) 소백산맥 너머 충청북도 단양(丹陽) 땅입니다.


  봉화 땅은 산이 많으니 들판은 적고 비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살기에 풍족한 지역은 아니죠. 논이 적어 쌀이 모자라니 산비탈을 일구어 밭농사로 부족한 먹을거리를 생산했습니다. 그러니 인구도 적은 지역이죠.


  조선 건국을 이끌었던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봉화사람입니다.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은 임금(태종)이 된 뒤에 봉화를 차별했겠죠. 역신(逆臣)이 난 고을이니까요.


‘춘양목(春陽木)’을 아시나요?


  춘향목을 들어보셨죠? 우리나라 소나무는 크게 세 종류로 나눈답니다. 북부의 백두송(白頭松)과 중부의 금강송(金剛松), 그리고 남부의 안강송(安康松)이죠. 조선시대까지 백두송은 운송 방법이 없었고, 안강송은 운송도 문제지만 굽고 뒤틀려 건축용 목재로 쓰기는 어려웠습니다.


  금강송의 나무속은 누런 송진이 많아 황장목(黃腸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송진은 나무의 썩음을 늦추기 때문에 건축용재로서는 그만이죠. 더구나 한강의 물길을 이용할 수 있어서 운송에도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었답니다. 조선시대 동안 한강을 이용해 운송할 수 있는 나무들이 한양의 건축용재나 땔감으로 베어졌답니다. 뚝섬이 뗏목의 종착지였죠.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임진란에 불탔던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한강 유역의 금강송들은 모조리 베어졌습니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 강점기 시대에도 건축용재가 필요했지만 한강유역에는 금강송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소나무가 춘양목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건축용재 소나무 생산지로 유명해진 곳이 춘양입니다.


  운송이 문제였습니다. 1942년. 일제는 청량리에서 경주까지 철도를 완공했습니다. 이 철도를 중앙선(中央線)이라 합니다. 중앙선은 영주(榮州)에 역을 만들었습니다. 춘양목을 영주역까지 운반하는 방법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춘양목 생산업자들은 영주역에서 춘양까지 철도를 놓으려고 시도했나 봅니다.


  조선총독부는 손익을 계산했겠죠.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철도를 목재운반하려고 부설하기에는 적합지가 않았겠죠. 그래도 목재업자들과 춘양사람들은 철도부설에 매달렸습니다. 그래서 ‘억지춘양’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이들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지역에 철도가 놓인 것은 해방도 되고 한국전쟁도 끝난 이후인 1955년 12월말이었습니다.


  강원도 태백지역에서 생산되는 무연탄을 전국으로 운반하려고 영주에서 태백의 철암까지 철도를 연결했습니다. 이 철도를 영암선(榮岩線)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이 때 춘양역이 생겼습니다. 철암에서 강릉까지 철도가 이어지자 영암선이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지금은 영동선(嶺東線)이라는 이름으로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산업화에도 밀려난 땅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공장은 운송에 편리하여 그 비용을 최소화하는 장소에 들어섭니다. 소비재는 서울 부근, 생산재는 남동해안지역에 생겼습니다. 당시 제3의 도시였던 내륙의 대구에는 운송비의 부담이 적은 섬유와 관련된 공장들이 입지했습니다.


  봉화는 산업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저 조상대대로 이어왔던 삶을 되풀이하며 더딘 변화의 삶을 살았습니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며 인구도 줄었습니다. 1990년대 이후 이 지역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솔숲이 많은 봉화에서 생산된 ‘송이(松栮)’가 이 지역을 대표하는 상품이 되었습니다. 도시화와 지구온난화로 사과의 재배지역이 대구에서 북쪽으로 옮겨와서 영주와 봉화는 주 생산지가 되었습니다.


  느린 변화로 옛것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경북 북부는 체험을 통한 새로운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봉화는 군 단위로는 가장 많은 정자(亭子)가 있답니다. 수 많은 한옥과 정자들과 전통을 이어가는 종택(宗宅)들은 문화유산의 보고(寶庫)들입니다. 우리는 그 중 하나인 성암고택(省菴古宅)에서 2박3일을 머뭅니다.


안동 권씨


  10세기. 고창(古昌)이라 불렸던 안동은 견훤의 후백제 땅이었습니다. 공산전투(지금의 대구 팔공산, 927)에서 신숭겸까지 전사하는 큰 패전을 한 왕건은 위기에 몰렸습니다. 이어서 벌어진 고창전투에서 왕건은 이 지역 호족들의 도움으로 견훤을 물리치고 경상도의 북부를 차지합니다. 왕건은 이 지역의 이름을 고창에서 안동(安東)으로 바꾸어 줍니다. 동쪽 땅이 안정되었다는 뜻이죠. 도움을 준 세 호족에게 성(姓)을 줍니다. 안동 김씨, 안동 권씨, 안동 장씨죠.


  경상도 사람들은 조선시대 동안 사림(士林)에서 동인(東人), 그리고 남인(南人)의 줄에 섰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사화(士禍)를 당했습니다.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 1607)이후 권력의 중심에 선 사람이 없습니다. 권력에 들어 갈 수 없으니 경제적으로는 가난해지고 남은 것은 자존심이었죠. 그래서 더욱 현재보다 과거에 집착하게 되고 벼슬 보다는 학문적 깊이를 숭상하게 되나 봅니다.


성암고택


  충재 권벌(沖齋 權橃, 1478~1548)을 아세요? 성종 임금 때 태어나서 중종, 인종, 명종 시대에 벼슬을 한 사람입니다. 지금의 경기도지사, 서울시장을 지낸 사람이죠. 권벌은 낙향하여 봉화 땅에 뿌리를 둡니다. 좋은 집터부터 골라야겠죠. 서애 류성룡이 연화부수(蓮花浮水)의 명당을 잡았다면, 충재 권벌은 금계포란(金鷄抱卵)의 명당을 잡습니다. 권벌의 종택이 있는 마을 이름이 ‘닭실’입니다. 굳이 한자를 써서 행적구역은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酉谷里)로 표기합니다. 닭실은 성암고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닭실의 권벌 종택에는 청암정이라는 멋진 정자가 있습니다.


  성암은 권철연(權喆淵, 1874~1951)의 호입니다. 조선말에 한양에서 성균관을 다닐 정도로 재력도 상당한 봉화지역의 유지였죠.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니 이 집을 ‘권진사댁’이라 부른답니다. 성암 권철연은 권벌의 후손이랍니다. 성암고택은 권철연의 손자부부가 서울 생활을 접고 낙향하여 고택을 지키고 있습니다.


  고택의 솟을대문 앞에 서면 사랑채 지붕 위로 보이는 나지막한 뒷산의 솔숲이 눈맛을 시원하게 해 줍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넓은 마당과 넓은 사랑채(산천재)가 이 집의 위품을 드러냅니다. 마당 왼편엔 서고(書庫)가 있고 사랑채에서 이어진 낮은 담은 외간남자의 출입 통제구역을 알립니다. 머리를 숙여 지나야 하는 낮은 중문을 들어서면 여성의 구역입니다. 사랑채와 ‘ㅁ'자로 이어진 안채와 그 뒤꼍에는 후원이 있습니다. 안채에는 넓은 대청이 있어 여름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답니다. 우리 수련회의 집회 공간이죠. 성암고택은 호텔급 한옥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주인 권탄웅 샘 부부의 넉넉한 인심은 플러스 알파!


2. 가는 길, 오는 길


이어지는 단종 임금 스토리


  2010년 3월 21일. 새청과 함께 역사탐방을 했죠. 그 때 단종과 정순왕후의 삶을 찾아보았습니다. 청계천의 영도교, 여인시장 터, 정업원 터, 동망봉, 자지동천을 돌아보았죠. 그건 기억 잘 안나고 옥토버페스트에서 마신 하우스맥주 생각만 난다고요?? ㅋㅋ

어쩌다보니 이번 수련회의 서울에서 춘양 가는 길이 그 후속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가지만 노산군으로 신분이 낮아진 17살의 소년과 그 일행은 뚝섬에서 배를 타고 영월로 갔습니다. 음력 6월이니 장마가 끝날 무렵이니 강물의 양이 많아 영월로 바로 갔겠죠.


  100여년 전에 조선에 왔던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베라 비숍도 한양에서 배를 타고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까지 다녀왔습니다. 길이 없었기 때문이죠. 영춘에서 조금만 더 남한강 상류로 올라가면 영월입니다.


  한강은 서울에서 상류로 올라가면서 이름이 달라집니다. 두물머리(양수리)에서 춘천으로 가는 북한강과 충주를 거쳐 영월로 가는 남한강으로 갈라집니다. 남한강은 영월에서 동강과 서강으로 나뉩니다. 동강을 따라 올라가면 정선의 아우라지에 이릅니다. 아우라지는 태백에서 흘러내려 온 골지천과 오대산에서 흘러오는 송천이 ‘아우러’지는 곳입니다.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靑怜浦)와 관풍헌(觀風軒)


  영월에 온 노산군은 청령포에 갇힙니다. 서강(西江)이 감입곡류하면서 만든 지형인 노산군 유배지는 삼면이 깊고 빠른 강물이 구비치고 뒤는 험준한 산이 막아선 곳입니다. 지금도 배를 타야 건널 수 있습니다. 서강을 거너 활주사면(point bar)의 자갈밭을 지나면 솔숲이 우거져 있습니다. 그 중 600년 나이의 고목이 된 소나무 이름이 관음송(觀音松)입니다. 당시 노산군의 유배생활을 보았고, 그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의미겠죠.


  민중은 약자의 편에 서서 노산군의 아픈 마음을 전합니다. 권력자는 비판하죠. 녹두를 발아시킨 녹두나물은 쉬 상합니다. 사람들은 마음을 바꾸어 수양대군(세조)의 편에 서서 권력을 이어 간 신숙주를 상징시켜 ‘숙주나물’이라 부릅니다.


  청령포에 잠시 머무는 사이에 태풍이 불어서인지 홍수가 났답니다. 노산군은 영월 관아의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깁니다. 이즈음에 김시습도 영월을 다녀가나 봅니다. 영월에서 남쪽의 백두대간 고치령을 넘으면 지금의 영주 땅, 당시 순흥도호부의 땅이었습니다. 순흥 땅에는 세종임금의 6째 아들 금성대군이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노산군의 작은 아버지 금성대군 역시 조카의 복위운동을 몰래 하고 있었습니다. ‘숙수사’라는 절에서 순흥의 사대부들을 모았죠. 그러나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수 많은 순흥(順興)의 사대부들이 반역이라는 죄명으로 목이 잘렸고 금성대군도 목숨을 잃었습니다(1457). 순흥도호부는 폐지되어 풍기군의 소속이 되었습니다. 숙수사는 폐사시켜 흔적을 지웁니다. 세월이 흘러 숙수사 빈터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이 땅에 주자학(성리학)을 들여 온 안향을 기려 백운동서원을 세웁니다(1542). 그 뒤 풍기군수가 된 퇴계 이황이 임금에게 직접 현판을 받아 백운동서원은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됩니다(1550).


  지금은 풍기(豊基)라는 이름도, 순흥이라는 이름도 영주시(榮州市)에 속한 읍과 면의 이름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관풍헌의 누각에 올라 노산군이 된 임금은 소년은 가슴 아픈 시를 남깁니다.



子規詞(자규사)


月白夜蜀魄추(월백야촉혼추)                 두견새 슬피 우는 달 밝은 밤에

含愁情依樓頭(함수정의루두)                 수심안고 누각에 의지하노라

爾啼悲我聞苦(이제비아문고)                 피나게 우는 네 소리, 내 듣기 괴롭구나

無爾聲無我愁(무이성무아수)                 네 울음 없으면 내 시름도 없을 것을

寄語世上苦勞人(기어세상고로인)             이 세상 괴로움 많은 사람들아

愼莫登春三月子規樓(신막등춘삼월자규루)     춘삼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소.


子規詩(자규시)


一自怨禽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으로 나온 뒤로

孤身雙影碧山中 (고신쌍영벽산중)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 속을 헤맨다.

暇眠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窮限年年恨不窮 (궁한년년한불궁)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두견새 소리 끊어진 새벽 멧부리 엔 달빛만 희고

血淚春谷落花紅 (혈루춘곡락화홍)           피눈물나는 봄 골짜기엔 낙화만 붉었구나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이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지

何柰愁人耳獨聰 (하내수인이독총)      어쩌다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는고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 실패는 노산군을 서인(庶人)으로 만듭니다. 요즘 서민(庶民)이라고 하죠? 이어 1457년 음력 10월 24일. 금부도사 왕방연은 사약을 들고 관풍헌을 찾아옵니다. 임금에서 서인까지 신분이 낮아진 소년은 임금이 된 작은 아버지가 내린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버렸습니다. 금부도사 왕방연은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심정을 담은 시조 한 수를 남깁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은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곳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왕방연은 한양으로 돌아와 사직하고 불암산 아래 먹골(墨洞)로 은거했답니다. 사약을 마시고 죽어가는 왕이었던 소년의 모습이 어른거렸겠죠. 봄철에 배꽃이나 감상하려고 배나무를 많이 심었답니다. 그 후 먹골은 한양의 배 생산지로 유명해졌습니다. 바로 ‘먹골배’죠. 지금은 아파트단지에 밀려 났답니다.


  짧은 16년의 생을 살았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나중에 현덕왕후)가 돌아가셨습니다. 10살엔 할아버지(세종)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문종)가 왕위를 이으니 세자가 되었습니다. 12살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왕이 되었습니다. 13살에 송현수의 딸(나중에 정순왕후) 결혼을 했습니다. 15살 나이에 왕위를 작은 아버지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고, 그 다음해엔 노산군으로 강등되더니 이내 서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음(1457)을 맞이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단종이 사약을 마시고 죽은 자리인 관풍헌 마당에서 향시가 열렸습니다.(1816년) 난고 김병연(蘭皐 金炳淵, 1807~1863)은 장원을 합니다. 자신의 할아버지를 맘껏 조롱하고 얻은 장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김병연이 삿갓을 쓰고 전국을 유랑하게 된 계기를 자신의 할아버지를 조롱한 불효의 개념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홍경래의 반란군에게 항복하여 역적이 되어 폐문이 되어서 벼슬길을 하지 못하는 낙심이 더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요? 그는 안동 김씨였습니다. 그나저나 관풍헌의 마당은 슬픔의 장소인 것 같습니다.


한양에서 가장 멀리 있는 왕릉, 장릉(莊陵)


  왕이었던 소년의 시신은 초겨울의 서강에 버려졌습니다. 아무도 주검을 거두어 줄 수 없는 분위기였나 봅니다. 용기있는 사람 엄흥도(嚴興道)가 단종의 주검을 거두어 몰래 무덤을 만들어 줍니다.


  240년이 흐른 후(숙종 25년, 1698년)에야 서인(庶人)은 노산군으로, 다시 단종으로 복권됩니다. 민중들은 단종이 죽어 태백산의 신령이 되었다고 믿고 싶어 했습니다. 태백산에 단종 사당을 세워 그 혼령을 위로해 주고 있답니다.


  단종으로 복권되자 엄흥도는 충신의 반열에 오릅니다. 영조 임금은 정려각을 세워주고 순조는 공조판서로 추증하고 고종은 충의공(忠懿公)이라는 시호를 내립니다. 영월 엄씨는 이 지방을 대표하는 명문가가 됩니다.


  단종의 부인도 송씨에서 정순왕후(定順王后)라는 이름을 얻었고 무덤은 사릉(思陵)이 되었습니다. 사릉은 현재 남양주시 퇴계원에 있습니다. 죽어서도 함께 묻히지 못한 부부를 사람들은 안타까워 했습니다. 20세기가 끝나가는 1999년 사릉의 어린 소나무 한 그루를 장릉의 무덤 앞에 옮겨 심었습니다. 소나무의 이름을 '정령송(精靈松)'이라 붙였습니다.


  어린 왕을 위하여 268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복권이 되었으니 단종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의 영혼도 위로를 받아야겠죠? 장판옥(藏版屋)은 그들의 위패를 모셔 놓은 곳입니다. 안평과 금성대군의 이름을 시작으로 사육신의 이름과 엄흥도의 이름까지 적혀 있습니다.


  살아있는 권력은 힘으로 잠시 민중을 누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민중은 약자 편에 섭니다. 민중은 오랜 세월을 두고 약자의 아픔을 이야기 합니다. 결국 역사의 승자가 됩니다. 약자의 아픔을 잊지 말야야겠죠?


* 영월읍 장릉 옆에 있는 장릉보리밥집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동강과 서강이 합류한 남한강을 따라 차는 달립니다. 영월군 하동면의 김삿갓(김병연) 살던 곳을 지납니다. 시간이 되면 잠시 보도록 하죠. 그리고 백두대간을 넘어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를 지나 춘양면 의양리의 성암고택에 이릅니다.


3. 춘양 주변의 이야기들


* 하늘 세 평, 꽃밭 세 평, 승부역

  영동선에 있는 간이 역입니다. 승객은 거의 없답니다. 이 역에 근무했던 분이 자그만 꽃밭을 일구며 외로움을 달랬나 봅니다. 그리고 자작시 ‘하늘 세 평 꽃밭 세 평’을 써 두었는데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도시의 번잡함을 벗어나 여유로움을 찾고 싶을 때 찾을 수 있는 장소입니다. 버스로 들어가는 길은 없습니다. 대중교통으로는 하루 몇 번 서는 기차 뿐이죠.


  자가용으로 가려면 석포에서 낙동강변의 좁고 굽은 길을 따라 가야합니다. 겨울에 ‘눈꽃열차’가 이 역에 1시간 정도 섭니다. 사람들은 이 역에 내려 ‘slow'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산골사람들은 농산물들을 들고 나와 관광객들에게 팔기도 하구요. 반짝 장이 여는 산골사람에게서 메밀부침에 좁쌀막걸리 한 잔으로 옛 삶을 돌아보는 회상에 젖기도 합니다.


* 청량산(淸凉山)


  경상북도 봉화군에 있는 해발 870m의 산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대로 표현하자면 ‘태백산맥’의 봉우리 중 하나입니다. 전통의 방법으로는 태백산맥 대신 ‘낙동정맥’으로 쓰면 되겠죠. 경상북도가 관할하는 도립공원입니다.

산세가 좋으니 찾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씁쓸하지만 광고의 카피처럼 ‘역사는 일등만 기억합니다’. 신라의 명필이었다는 김생(金生, 711~791), 신라의 문장가 최치원(崔致遠, 857~?)이 청량산에서 공부했답니다.


  1360년 9월에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해 서울이었던 개경(개성)을 함락시킵니다.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신했답니다. 그 안동이 바로 청량산입니다. 방어를 위해 산성을 쌓고 전쟁 준비를 했겠죠. 공민왕은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부석사를 들립니다. ‘무량수전’을 짓는 공사를 하고 있었나 봅니다. 박정희가 그러했듯 현판을 남긴답니다. 지금도 부석사 무량수전엔 공민왕이 쓴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청량산과 퇴계 이황(1501~1570)


  청량산하면 퇴계 이황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막내아들로 태어나 7개월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답니다. 아버지 얼굴도 기억 못했겠죠. 12살 때 작은아버지 이우에게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 장소가 청량산입니다. 퇴계는 틈만 나면 청량산을 찾았습니다. 청량산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입니다. 도산면에는 그가 태어나 살던 집이 있고, 후학을 가르치던 도산서당이 있습니다. 물론 주검도 이곳에 묻혔습니다. 집에서 청량산까지 낙동강변을 따라 걸었던 ‘퇴계 예던 길’도 여기에 있습니다.


  고인(古人)도 날 못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봐도 예던 길 앞에 있네

  예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예고 어쩔꼬


  퇴계가 말한 고인은 바로 성리학을 열었던 주희(주자)죠. 조선 500년, 아니 지금까지도 우리의 삶을 규제하는 건 성리학이 아닐까요? 율곡이 서인과 노론이 추앙하는 인물이라면 퇴계는 남인이 추앙하는 인물입니다.


  퇴계와 율곡 초상화가 우리나라 화폐의 천원권과 오천원권을 차지합니다. 성리학이 지배하는 나라라는 얘기죠. 그런데 퇴계는 천원권이지만 율곡은 오천원권입니다. 더욱이 오만원권이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 신씨라면 노론의 나라 맞죠? 사임당 신씨가 율곡을 낳은 것 말고 어떤 역사나 문화적 자취를 남겼을까요?


퇴계의 후손 이육사


  퇴계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산면 토계리에는 14대 후손 이원록(1904~1944)의 문학관이 있습니다. 이원록이라는 본명보다 이육사라는 시인의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의열단에 가입해 군사훈련도 받은 투사입니다. 국내로 들어와 독립운동과 감옥생활을 되풀이 했습니다. 국내와 중국을 오가며 활동하다 베이징에 있는 일본영사관의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나는 늘 서정주와 이육사를 비교하곤 합니다. 호남의 만석꾼 김성수 땅의 소작인을 관리하는 ‘마름’의 아들로 자란 서정주와 퇴계의 후손으로 태어나 지조와 학문적 가치를 숭상했던 이육사는 같은 시인이지만 걸었던 길은 달랐습니다. 가정과 지역의 사회적 환경이 너무 달랐던 게 아닐까요?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여선 지고

큰 江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우리는 청량산을 갑니다. 정상까지 올라가는 등산은 힘들겠죠? 너무 더우니까요. 주차장에서 청량사로 올라가는 급한 경사의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은 내려 올 때 걸을 겁니다. 넓은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 역암(礫岩)의 절벽에 좁은 산길을 따라 걷습니다. 암벽 밑에 소박한 암자 응진전이 있습니다. 응진전의 스님은 좁은 땅을 일구어 채소농사를 짓습니다.


  좀 더 걸으면 퇴계가 작은아버지 이우를 따라 청량산에서 공부했다는 청량정사입니다. 이어 청량사죠. 여기에도 의상과 원효의 이름이 창건주로 등장합니다. 청량사의 본전은 유리보전입니다. 약사여래를 주불(主佛)로 모시죠. 약사여래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부처입니다. 민중의 가장 큰 두려움은 아픔과 죽음입니다. 아픈 몸의 치유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은 오늘도 청량사를 오를 겁니다. 안심당의 굴뚝이 참 예쁩니다. 가을이 익어 온 산에 단풍이 들면 산사음악회도 연답니다. 우리는 청량산을 내려와서 낙동강변에서 물놀이로 더위를 식힐겁니다.


*척곡교회와 명동서숙


  네비게이션 없이는 찾기도 힘든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法田面 尺谷里) 산골에는 노인 12명이 모이는 작은 교회가 있습니다. 젊은 사람은 찾아 볼 수 없는 이 교회의 역사는 100년이 넘었답니다.


  조선말 한양에 살던 탁지부(지금의 재정경제부?) 관리였던 김종숙(1874~1956)이란 분이 일찍 개신교인이 되었나 봅니다. 새문안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보아 언더우드 선교사와 친분이 있었겠지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낙향하기로 결정하여 척곡리의 산골로 들어옵니다.


  그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 1907년 척곡교회를 세우고 1909년 3월엔 건물을 완공합니다. 명동서숙도 세워 민중의 교육을 담당합니다. 산골인지라 일본의 통제가 약하여 항일운동 장소로도 이용되었답니다.


  지금은 설립자 김종숙의 손자 김영성 장로가 교회의 모든 일을 맡아서 하고 있답니다. 86세 노령의 장로가 피아노 반주까지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음악교사였답니다. 예장통합측 교회이지만 향린은 모든 종파를 초월하죠! 8월 15일의 예배를 이 교회에서 드립니다.

 

* 척곡교회의 행사가 끝나는대로 서울로 출발합니다.

 

 

 

출처 : 구름 가듯 물 흐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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