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들 이

금성대군의 신단(펌)

두타 2008. 9. 12. 08:11

단종보다 더 슬펐던 금성대군의 신단


단종임금은 영월 땅에서 젊은 나이에, 삼촌인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영월에서 멀지 않은 영주 땅에서는, 수양대군의 친 동생인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라는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단종복위 운동을 하다가 끝내는 죽음을 맞았다.


그 슬픈 역사의 장소인 금성단. 한 많은 세월을 살다가 간 금성대군 역시, 권력에 의해 불행하게 일생을 마친 슬픈 역사의 주인공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70번지. 소수서원에서 부석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좌측에 금성단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사적 제491호인 금성단은 세조 2년인 1456년에, 성삼문 ? 박팽년 ? 하위지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 운동에 연루가 되어 금성대군이 위리안치 당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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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은 이곳에서 순흥부사 이보흠과 향중 유림들과 더불어,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순절을 하였다. 금성단은 바로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마련된 제단이다. 단종복위를 꾀했다는 이유로 순흥부는 폐부가 되었다. 그 후 숙종 9년인 1683년, 200여년이 훨씬 지난 다음에 순흥부가 복원이 되고, 순절을 당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제단을 꾸몄다. 숙종 19년인 1693년에는 순흥부사 정중창이 금성대군이 위리안치 당했던 자리에 제단을 쌓았고, 숙종 45년인 1719년에는 부사 이명희가 삼단으로 고쳐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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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금성단 제실입구. 좌측은 살림집인듯 하다. 우측은 제실이다. 찾아간 날은 도배를 하고 있었다.(가운데) 금성단 입구 (아래) 금성단 모습


그 후 영주 18년인 1742년에는 경상감사 심성희가 처음 자리에서 서쪽으로 30~40보를 옮겨 단을 정비하고, 순의비를 세웠다. 그때부터 관리사를 지어 매년 봄 ? 가을에 제향을 지낸다.


금성단을 찾은 날은 마침 제각을 도배하고 있었다. 집은 여기저기 도배를 하느라 정리가 되어있지를 않아 단으로 올랐다. 문을 들어서니 양편 담장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자른 흔적이 보인다. 오래된 고목인 듯한데, 왜 잘라내었을까? 돌담을 두른 제단에는 중앙에 「금성대군지위」란 쓴 상석이 보이고, 양편에는 「부사이공보흠지위」와 「제의사지위」라 음각한 상석이 있다. 금성대군의 상석 곁에는 「유명조선 단종조충신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라 음각한 순의비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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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을 중앙에 두고 앙편에는 순흥부사 이보흠과 각 제위들을 모셔 놓았다


넓지 않은 금성단. 푸른 잔디들이 애써 그 푸름을 자랑하지 않는 것도, 아마 그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의 비극이 싫어서는 아니었을까? 차가운 상석 하나 남겨놓고 사라져간, 그런 슬픔은 아니었을까? 찾아주는 이도 없고, 아무도 그런 역사의 소용돌이를 눈여겨보지도 않는다. 그저 길 앞으로 하루 종일 오가는 그 많은 차들도, 이곳에 멈추지도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외로움은 마찬가지인지. 아마 그 혼백은 아직도 위리안치의 고통에서 가시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근처 고목에서 까치 한 마리가 시끄럽게 울어댄다. 모처럼 들린 객을 반기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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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의 순의비와(위) 문 옆 담장 한편에 잘린채로 ?어가고 있는 나무. 양편이 다 잘려있었다. 보기 흉한 몰골로(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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