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순흥

두타 2017. 12. 16. 07:20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단종 복위 꿈꿨던 금성대군… 순흥서 스러져 ‘산신령’으로 남다 입력 : 2017-11-17 17:36 ㅣ 수정 : 2017-11-18 00:49폰트 확대 폰트 축소 프린트하기

순흥 ~ 은평뉴타운 ‘금성대군의 자취’

순흥(順興)은 오늘날 경상북도 영주시의 일개 면(面)일 뿐이다. 하지만 순흥의 역사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삼국시대 순흥은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대였다. 고구려는 장수왕 시절 죽령을 넘어 영주 일대까지 장악했다. 죽령을 사이에 두고 영주와 이웃한 충청북도 단양에 고구려 온달장군의 전설이 어린 온달산성이 남아 있는 것도 이런 역사와 관계가 있다.

금성대군을 민간신앙의 주신(主神)으로 삼은 서울 은평뉴타운의 금성당. 클릭하시면 원본 보기가 가능합니다.

▲ 금성대군을 민간신앙의 주신(主神)으로 삼은 서울 은평뉴타운의 금성당.

순흥에 고구려의 장례 풍습을 보여주는 벽화고분이 남아 있는 것도 그렇다. 풍경화를 방불케 하는 연꽃 그림은 일본 미술에도 영향을 미친 고구려 특유의 표현이라고 한다. 가까운 부석사의 창건설화도 그렇다. ‘삼국유사’에는 의상대사의 부석사 창건을 방해하는 ‘500명이 도둑’이 보이는데, 학계는 이들을 신라에 협력하지 않은 고구려계 주민으로 본다.

고구려 통치 시대 순흥은 급벌산군(及伐山郡)이었다. 이후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이 급산군(及山郡)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는 흥주(興州), 순안현(順安縣), 순흥부(順興府)로 잇따라 개칭했다. 순흥은 조선 초기 전국 75개 도호부의 하나였다. 하지만 1457년(세조 3) 도호부는 폐지되고 땅덩어리는 풍기·봉화·영주 세 고을로 분산됐다.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사건 때문이었다.

경북 영주 순흥면의 금성대군신단. 클릭하시면 원본 보기가 가능합니다.

▲ 경북 영주 순흥면의 금성대군신단.

오늘날 영주의 양대(兩大) 문화유산이라면 부석사와 소수서원을 꼽아야 할 것이다. 이 고장의 유교문화와 불교문화를 상징한다. 이들을 돌아보려면 중앙고속도로 풍기 나들목을 이용하게 마련이다. 풍기는 인삼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이맘때 찾으면 사과가 지천이다. 풍기에서 소수서원이 있는 순흥을 거쳐 부석사에 이르는 길은 문화유산 순례길이다. 순흥 벽화고분도 이 길 주변에 있다.

●역적의 땅 된 순흥, 이름마저 200년간 사라져

소수서원에서 나와 부석사로 방향을 잡으면 곧바로 왼쪽에 금성대군신단(錦城大君神壇)이 보인다. 그냥 지나치기 일쑤지만, 잠시 둘러보기를 권한다. ‘역적의 땅’이 되어 순흥이라는 이름마저 200년 넘게 사라지게 했던 역사가 담겨 있다. 정축지변이란 금성대군이 주도하고 순흥부사 이보흠이 뒷받침한 단종 복위 운동과 뒤따른 대학살 사건을 이른다.

세종은 6명의 부인과 18남 4녀의 자녀를 두었다. 정비인 소현왕후 심씨와 사이에는 8남 2녀가 있었다. 첫째가 세종의 보위를 이은 문종이고 둘째가 문종의 맏아들인 어린 조카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 곧 세조다.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이 뒤를 이었다. 그러니 금성대군은 세종의 여섯 번째 적자(嫡子)다.

영월과 순흥을 잇는 고치령의 산령각. 단종과 금성대군을 태백산 산신령과 소백산 산신령으로 모시고 있다. 클릭하시면 원본 보기가 가능합니다.

▲ 영월과 순흥을 잇는 고치령의 산령각. 단종과 금성대군을 태백산 산신령과 소백산 산신령으로 모시고 있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금성대군에 앞서 목숨을 잃은 형제는 안평대군이었다. 시문(詩文)과 서화(書畵)에 능했던 안평대군은 문종 시절 조정의 실력자 역할을 하면서 김종서를 비롯한 주요 문신과 가까웠으니 수양대군과는 라이벌이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킨 1453년 반역을 도모했다는 구실로 유배지 교동도에서 사사(賜死)한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금성대군은 단종의 측근을 제거하려는 수양대군의 뜻에 따라 1455년 오늘날의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을 아우르는 삭녕에 유배된 데 이어 경기도 광주(廣州)로 이배된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넘겨받은 해다. 이듬해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이 단종 복위를 노리다 실패한다.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다. 이미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된 단종은 1457년 영월로 유배되는데, 이때 금성대군도 순흥에 위리안치된다.

금성대군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는 데는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가 도움이 된다. ‘공이 순흥부에 이르러 이보흠과 마주하여 눈물을 흘리고 산호 갓끈을 주었다. 드디어 주변 지역 인사와 몰래 결탁하여 상왕(上王)을 복위시킬 계획을 하고 이보흠을 불러 좌우를 물리고서 격문(檄文)을 기초하게 하였는데, 순흥의 관노(官奴)가 벽에 숨어 들은 뒤 공의 시녀와 교통하여 초안을 훔쳐 달아났다.… 공과 이보흠이 잡혀 죽었고, 지역과 주변 인사 중 사형에 연좌된 자도 많았다.’

금성대군은 순흥에서 의거를 일으키면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도 선비들이 대거 뜻을 같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 영월 청령포에서 노산대군을 모셔와 다시 임금으로 세우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강원도 영월과 경상도 순흥은 심리적 거리가 멀지 않다. 비록 좁은 산길이지만, 태백산이 끝나고 소백산이 시작되는 곳에 고치령이 있다. 이 고개 정상에는 산령각(山靈閣)이 있다. 단종과 금성대군을 태백산 산신과 소백산 산신으로 각각 모셨다. 역사를 민중의 시각에서 해석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

금성대군은 안동부 관아에서 사사됐다. 시신이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무덤도 없다. 순흥에는 금성대군이 피를 흘리며 죽은 자리에 신단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지만, 전설일 뿐이다. 순흥이 복읍된 것은 숙종 시절이다. 이후 금성대군신단은 1719년(숙종 45) 설치했고 1742년(영조 18) 정비했다고 한다.

신단은 품(品) 자 형태로 3개의 단을 설치했다. 가운데가 금성대군, 왼쪽이 이보흠, 오른쪽이 순절의사를 기린다.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라고 새긴 비석도 세웠다. 금성대군과 이보흠은 물론 화를 입은 사람들 모두를 추모하는 제단이라 할 수 있다.

금성대군의 아들 이맹한은 충청도 청주에 유배됐다. 이후 중종 시절인 1519년 함종군에 복작되며 명예회복이 이루어진다. 충북 청주 미원면 대신리에는 금성대군 제단(祭壇)이 있다. 그를 정점으로 하는 전주 이씨 금성대군파 묘역이다. 제단 오른쪽에는 부인 전주 최씨의 무덤이 있다. 합장묘라는 상징성을 부여한 것이다.

충북 진천 초평면의 청당사(靑塘祠). 금성대군과 전주 최씨의 사당이다. 클릭하시면 원본 보기가 가능합니다.

▲ 충북 진천 초평면의 청당사(靑塘祠). 금성대군과 전주 최씨의 사당이다.

●충북 진천·영월에도 금성대군 사당·위패 보존

청주 제단에서 자동차로 20~30뿐쯤 걸리는 충북 진천 초평면 용기리에는 금성대군의 사당인 청당사(靑塘祠)가 있다. 사당을 지은 시절에는 진천이 아닌 청안 땅이었다. 영조 16년(1740) 세웠지만, 흥선대원군이 훼철한 것을 1974년 중건했다고 한다. 충북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주변은 정리되지 않았고, 쓸쓸한 느낌마저 든다.

금성대군은 단종의 무덤인 영월 장릉의 배식단(配食壇)에도 배향되어 있다. 정단(正壇) 32인과 별단(別壇) 236인 등 268인의 위패를 봉안한 제단이다. 금성대군의 위패는 육종영(六宗英)의 일원으로 정단에 봉안되어 있다. 육종영은 안평대군을 비롯한 여섯 종친을 뜻한다.

고치령 산령각에서 보듯 금성대군은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더욱 각광받았다. 서울과 경기 지역에도 금성대군을 모신 여러 곳의 굿당이 있었다. 이 가운데 서울 은평뉴타운 한복판의 금성당은 한때 사라질 위기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금성당 건물은 샤머니즘박물관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해마다 5월이면 금성당제도 열린다. 지하의 금성대군도 자신이 ‘아파트 타운 축제’의 주인공이 될 줄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1118016002&wlog_tag3=daum#csidx004e0d349bfd5a889a51f99f7553b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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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安平大君, 1418(태종 18)년∼1453(단종 1)년] "몽유도원도에 담긴 조선 왕자의 꿈" 

 

세종의 세 아들 – 문종, 수양대군, 안평대군

세종의 아들들 중 가장 출중한 셋을 꼽으라고 한다면 별로 주저하지 않고 문종,수양대군, 안평대군을 지목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은 일찍이 장남(훗날 문종)을 왕세자로 책봉하여 대리청정을 맡기고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게도 국정을 보필하게 했던 것으로 보아 이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각별히 아꼈다고 할 수 있다.이들은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또 세종의 특별 지도를 받으며 박학다식하고 시서화악(詩書畵樂)을 두루 하는 지성인으로 성장하였다.

안평대군 이용(李瑢)은 세종이 즉위한 지 한 달 여 만인 1418년(세종 즉위년) 9월 태어났다. 위로는 큰형 문종과 한 살 위의 형인 수양대군이 있었다. 1421년(세종 3) 네 살 때 요절한 숙부 성녕대군의 양자로 들어갔고, 1428년(세종 10)열한 살에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그 이듬해인 열두 살에 정연(鄭淵)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의 장인 정연은 세종조에서 병조판서를 역임하는 등 세종의 측근 총신이었다. 이처럼 안평대군은 안팎으로 든든한 배경과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왕실의 주요 일원이었다.

 

 

안평대군, 예능과 재력으로 일세를 풍미하다

 

 

세종시대는 조선 500여 년 역사의 첫 번째 태평성대라고 할만하다. 부왕 태종이 다져놓은 조선의 기틀 위에 수성을 맡은 성군 세종이 선도하여 정치, 사회, 문화 발전을 이루어나간 시기이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난 안평대군이 왕실의 일원으로서 물려받은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그의 예술혼과 감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당시 안평대군은 시서화 삼절로 불리며 일세를 풍미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택인 인왕산 기슭의 비해당(匪懈堂)과 별장인 담담정(淡淡亭), 꿈속에 본 도원과 비슷한 곳을 찾아 지은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시제(詩題)로 하여 집현전 문인들과 수창하며 비해당사십팔영, 담담정십이영, 무계수창시와 같은 연작시를 비롯하여 많은 시를 남겼다. 그러나 그의 시 작품은 거의 소실되었고 몇 편만이 다른 사람의 문집에 흩어져서 전해질 뿐이다. 안평대군의 시에 대해서는‘깊이 체득하여 독실히 좋아했으므로 그 시법의 오묘함이 월등하였다.’고 박팽년이 극찬한 바 있다.

안평대군은 시도 뛰어났지만 글씨는 더욱 일품이었다. 원나라 조맹부의 글씨인 송설체를 따르면서도 그를 능가하여 ‘안평체’라는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정조는 안평대군의 글씨를 국조의 명필 중에서 으뜸이라고 평가하고 나서 이 글자가 매우 좋아 활자로 주조하고 싶다는 뜻을 그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밝히기도 하였다. 앞서 문종이 안평대군의 글씨체를 모사하여 ‘경오자(안평대군자)’를 주조하였지만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이 처형된 후 바로 녹여졌다.

안평대군의 그림은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지만 그의 그림을 보았다는 당시의 기록들이 있다.

안평대군은 본인이 직접 예술 창작 활동을 왕성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진귀한 작품들을 널리 수집하였다. 1445년(세종 27) 10여 년간 모은 자신의 서화 소장품을 신숙주에게 보여주며 이를 기록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화기(畵記)」가 그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 기록을 통해 실물은 남아 있지 않더라도 안평대군이 갖고 있던 최고 걸작들의 목록이나마 확인해볼 수 있다.

안평대군의 값지고 방대한 소장품들은 당대 문인과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신숙주의 「화기」에는, “ 안견(安堅)이 고화를 많이 열람하여 그 요령을 다 터득하고 여러 사람의 장점을 모아서 모두 절충하여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라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안평대군이 조선초 문화예술계의 중심에서 빛나는 활약을 하였던 만큼 그에 대한 평가도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안평대군에 대한 인물평이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되었다. 다소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면모도 그려져 있으나 안평대군이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은 더욱 뛰어났으며 서법은 천하제일이고 또 그림과 음악도 잘했다는 평가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단종실록』에 나오는 안평대군 평가는 다소 악의적이다. “(안평대군) 이용은 시문과 서화를 좋아하고 소예에 능한 것이 많았으며 세종 조 때부터 권세 있는 사람을 초대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간사한 소인이 이에 아부했는데 이현로(李賢老)가 으뜸이었다.” 계유정난으로 처형된 안평대군을 역적으로 매도해야 했던 당시의 분위기가 반영된 듯하다.

최항(崔恒)은 명나라 사신 예겸이 안평대군의 글씨를 찬양하여 지은 시에 조선 문인들이 화답한 비해당 시축(詩軸) 서문에서 ‘영웅호걸의 자태로서 존경할 만큼 지극한 부귀를 지녔음에도 담박함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선함으로 즐기며 인에 의해 예를 즐기는 자’라고 하여 안평대군의 인품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안평대군의 꿈, 몽유도원도는 말한다

 

 

몽유도원도는 오늘날 남아있는 안평대군의 유일한 시서화 작품이다. 1447년(세종29) 안평대군은 무릉도원을 노니는 꿈을 꾸고 나서 가깝게 교유하고 있던 당대 최고의 화원 안견에게 그 꿈을 그리게 하였다. 안견은 사흘 만에 그림을 완성하였고, 거기에 안평대군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담은 도원기를 썼다. 도원도와 도원기가 완성된 후 안평대군은 꿈에서 자신과 동행했던 박팽년을 불러 서문을 지으라고 하였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문인 21명에게 찬문을 받았다. 이리하여 몽유도원도는 길이가 20여 미터에 달하는 거작으로 완성되었다. 현재 표구된 순서는 신숙주, 이개(李塏), 하연, 송처관, 김담, 고득종, 강석덕, 정인지, 박연, 김종서, 이적, 최항, 박팽년, 윤자운, 이예, 이현로, 서거정, 성삼문, 김수온(金守溫), 만우, 최수의 순이다.

유토피아 즉 이상향의 모태는 도연명의 도화원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상향을 꿈꾸고 노래하고 그렸다.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도 그 수많은 유토피아 환상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너머를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안평대군 자신도 도원기에서 마치 예지몽인양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와 무릉도원을 동행한 자는 박팽년, 신숙주, 최항이다. 그들 중 신숙주와 최항은 안평대군을 배신하고 수양대군의 편에 섰는데 몽유도원도 찬문에서 가장 상세하게 도원을 묘사하며 은거하고자 하는 안평대군의 선택을 예찬하였다.

그러나 안평대군은 은거의 꿈을 접고 정치 현장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어린 단종을 남기고 문종이 갑자기 승하하면서 정치적 상황이 급변하였기 때문이다.당시 어린 임금을 지키는 것은 종묘사직을 위한 급선무이자 중대한 일이었다.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 등이 단종의 보호세력이 된 상황에서 안평대군은 이들과 연대하였다. 단종의 편에 선 연대세력의 가장 큰 난관은 정치적 야심을 드러내고 있던 수양대군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고, 안평대군은 첨예한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러던 중 1453년(단종 1) 10월 10일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수양대군이 안평대군과 손잡은 김종서, 황보인 일당의 반역을 처단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거사를 단행한 것이었다. 그날 밤 김종서와 황보인은 죽임을 당했고 안평대군도 강화도로 압송되었다가 며칠 후 교동도로 이송되어 사사되었다. 안평대군은 시신이나 무덤도 발견되지 않은 채 사라져버렸고, 안평대군의 자취들 역시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의 저택 비해당은 물론 그곳에 수집 보관되어 있던 수많은 서적과 서화 작품들이 남김없이 사라졌고, 그가 직접 쓰고 그렸던 시문서화 작품들 역시 거의 다 사라졌다. 무계정사도 파괴되었다. 문인과 예술가로서의 그를 평가하고 기릴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안평대군을 추억하는 길

 

 

안평대군은 영조 대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복권되었다. 숙종 대 단종과 사육신에 대한 복권이 이루어지면서 계유정난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던 것에 힘입었다.

영조는, “안평대군은 다만 글 잘하여 이름이 드높았고, 따르는 선비들을 모아 연회를 즐긴 것이 화가 됐을 뿐입니다. 그가 어찌 왕이 되겠다는 분에 넘치는 욕심이 있어 반역을 꾀했겠습니까? 이미 김종서, 황보인 등의 관작이 회복됐으니 마땅히 안평대군의 원통함을 풀어주소서.” 라는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요청을 듣고 숙종도 안평대군의 글씨를 사랑하였다고 하며 복권을 허락하였다. 이어 영조는 안평대군에게 ‘장소(章昭)’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조는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희생된 자들을 직접 선정하여 이들의 위패를 영월 단종의 장릉에 모시고 단종과 함께 제사 지내게 했다. 특히 순절한 왕자와 대신, 사육신 등 충신 32인의 관작과 시호를 적은 위패를 ‘충신지위(忠臣之位)’라 명명하고 안평대군을 제일 앞에 모셨다. 또 안평대군의 제단에 바치는 치제문을 직접 짓기도 하였다.

안평대군의 복권과 추모는 이렇게 이루어졌지만 그를 추억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몽유도원도가 있어서 안평대군의 꿈과 생각을 느낄 수 있긴 하지만 그것마저도 우리는 쉽게 볼 수 없다. 현재 몽유도원도는 일본으로 유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끔 일본에서 빌려와 특별전시할 때에만 애태우며 간절하게 볼 수 있을 뿐이다.

몽유도원도는 임진왜란 때 약탈당하여 어느 시점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넘어간 뒤 일본의 유력 가문을 전전하며 유랑하다가 현재 덴리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된 것으로 밝혀졌다.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이 사사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던 몽유도원도는 일본 월간지 『동양미술』 1929년 9월호에 「조선 안견의 몽유도원도」라는 제목의 논문이 발표되면서 현존하고 있음이 알려졌다. 당시 몽유도원도는 일본 정부에 등록된 중요 예술품이었고, 그 논문은 몽유도원도를 ‘조선 고금을 통틀어 제일의 화가 안견과 서가 안평대군 그리고 조선 제일의 문사, 충신, 명신, 명인이 모두 등장하는 대작’ 이라고 평가하였다. 안평대군의 작품이 거의 다 사라진 상황에서 남아있는 유일한 시서화 작품 몽유도원도의 가치를 우리가 제대로 지키는 것이 안평대군을 올바로 추억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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